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피사로 (문단 편집) === 푸냐의 전투 === 1530년 연말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선발대가 파나마를 출발해 1531년 초 툼베스에 도착했다. 그런데 지난번과 달리 툼베스의 분위기는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. 알고보니 피사로가 스페인로 떠났던 사이, 잉카 제국 내에 [[내전]]이 발생했던 것이다. 툼베스 역시 내전에 엮였던 탓에 제 코가 석자라 이방인들을 환대할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. 결국 피사로는 상황 판단을 하고 가까운 푸냐 섬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후, 이를 실행에 옮겼다. 처음에 피사로 선발대는 평화롭게 푸냐 섬을 접수하고 원주민들과 교류했다고 하나,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이 높아져 갔다. 당시 푸냐 섬 원주민들은 잉카 제국에 대한 소속감이 적은 데다가 호전적이었고, 인근 툼베스 사람들과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. 그런데 하필이면 피사로 원정대의 통역은 툼베스인이었던 것이다. 결국 긴장감이 높아져 가는 상황에서 툼베스 출신 통역이 스페인인들에게, >"지금 푸냐족이 당신들을 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!" 라고 전하자, 그렇잖아도 자기들 인원이 200명도 안 될 정도로 너무 적어 겁에 질려 있었던 피사로 선발대는 선빵을 날려 푸냐족 지도자 몇 명을 체포, 고문한 후 툼베스로 보내버렸다. 그러자 툼베스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들을 죽여버렸다고 전해진다. 이런 일이 발생하자 푸냐족이 분노한 것은 당연지사였고, 결국 1531년 4월경에 전투가 벌어졌다. 그런데 수천 명의 푸냐족을 180명의 스페인인들이 쳐부숴 버렸다.[* 문헌에 따르면 피사로 선발대는 보병 160명, 기병 27명이었으며 전사자는 단 3명뿐이었다고 한다.] 하지만 전투 결과와 상관없이, 선발대는 푸냐족으로 가득찬 섬 한복판에 갇혀버린 셈이 되었고, 이후로도 피사로 원정대는 [[게릴라]]에 의해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받았다고 한다. 결국 원정대의 지휘관 중 한 명인 [[에르난도 데 소토]][*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훗날 [[플로리다]]를 탐험하고 [[미시시피 강]]을 처음으로 목격한 인물이다.]가 이끄는 후발대가 도착하자 피사로는 다시 툼베스로 귀환했다. 다만, 이 사건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. 스페인 측의 기록에 따르면, 처음에 푸냐 섬에 진입할 때 당한 공격으로 스페인 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, 이에 푸냐족 족장과 원로들을 생포한 뒤, 이들을 죽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. 하지만 [[전투]]라고 할 만한 충돌이나, 그에 따른 대규모 [[학살]]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. 어쨌든 후세의 몇몇 역사가들은, 이 푸냐의 전투가 바로 다음에 일어날 [[아타우알파]] 체포 사건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. 자신의 영토에서 웬 야만족들이 거하게 깽판을 친 이 사건을 전해들은 아타우알파가 스페인인들에게 비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